지난 주말. 우리 집 거실 풍경을 먼 발치에서 살펴보았다. TV를 보고 있는 아이. 휴대폰을 보고 있는 아내. 그 옆에 널부러 져 있는 내 아이패드. 세 식구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정신은 모두 다른 곳에 있었다. 아이는 콩순이와, 아내는 쇼핑몰에, 나는 유튜브에.
점심먹을 시간이 되자 세 식구가 모두 식탁에 모였다. 아이는 의자에 앉아서 TV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아내는 아직 쇼핑이 끝나지 않았다. 내 휴대폰의 유튜브 영상도 아직 재생중이었다. 점심식사도 휴대폰으로 주문한 음식들이 플라스틱 그릇 안에 담겨 있었다.
이게 뭐지.
마치 가족들 한명 한 명이, 전자기기와 자신의 관계를 해칠 지 모르는 불편한 존재가 된 것 같은 이상한 느낌. 눈 앞의 두 사람에게 잔소리를 하자니 내 손에서 재생되고 있는 영상이 끊기는 게 더 싫은. 이 괴상한 느낌.
아이가 점심을 먹고 나서, '밥을 잘 먹었으니 TV틀어 주세요' 라고 이야기를 한다. 태어난 지 고작 26개월 밖에 안 된 아이가 TV를 보기 위해 밥을 먹고 있다. 밥이 TV 아래에 있는 것이다.
이건 또 뭐지.
TV를 끄고 아이에게 놀이터에 가자고 했다. 헬리곱터 장난감을 가지고 놀이터에 나가서 미끄럼틀을 타자고 해 보았다. 아이가 세상 부지런하게 옷을 입고, 모래놀이를 위한 장난감들을 가지고 왔다. 유모카에 장난감들을 싣고 아파트 놀이터에 갔다. 모래밭 위에 쪼그리고 앉은 아이가 개미들을 구경하며 이게 뭐냐고 물어 본다. 날아다니는 조그만 벌레들을 보며 저게 뭐냐고 한다. 새소리를 듣고 누가 내는 소리냐고 한다.
아이와 잠깐 이야기를 하다가 한발 떨어져 놀이터 풍경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엄마 아빠들이 모두,
휴대폰을 보고 있다(!)
아이들은 그네와 시소와 미끄럼틀을 타며 엄마와 아빠를 보고, 엄마와 아빠는 휴대폰을 본다.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가 언제 나를 보는지를 보면서. 기다리면서 그네를 탄다.
집에 돌아와 잠 잘 시간이 되자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고싶다고 한다. 아내가 할아버지와 영상통화를 연결 해 주자 아이가 할아버지 집에 가겠다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사신다. 놀란 할아버지가 슬리퍼 바람으로 달려오셨다. 할아버지 손에는 휴대폰이 없다. 할아버지는 유튜브를 모르고, 쇼핑은 마트나 백화점에 가서 한다. 아이와 있을 때에는 아이만 본다. 아이는 할아버지를 가장 좋아한다.
아내에게 앞으로 집에서는 휴대폰을 손에 들지 말자고 했다. 어제는 퇴근 후에 처음으로 휴대폰을 선반 위에 올려 놓고 잠들기 전까지 꺼내들지 않았다. 딱히 뭔가를 한 게 없는데도 아이가 너무 좋아한다. 나에게 계속 말을 걸어 온다. 지금 보니, 예전에는 아이가 한 말에 집중하거나 길게 대꾸 해 준 적이 없었다. 자신의 말에 반응하는 아빠가 아이에게는 낯설었던 것이다. 그러니 신기해서 자꾸만 말을 걸어 오는 것이다.
초콜릿을 먹고 싶은데. 아빠가 허락을 안 해 주니까. 어떻게든 설득력 있는 말을 해 보려고 노력한다. 아이가 입과 몸을 최대한 동원하는 게 느껴진다. 아- 말은 입과 몸이 함께 만들어 내는 것이었지. 이제 아내의 말도 들려 오기 시작한다. 직장에서 있었던 일, 여름에 어디로 놀러 가자는 이야기. 시시콜콜하지만 중요한 여러 말들. 유튜브에 막혀 있던 가족들의 말들이 이제 들리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집에 오면, 집에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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